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5.18 민주화운동/왜곡/북한 개입설 (문단 편집) === 시민군측 카빈소총 사상자는 북한군의 소행이다?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79&aid=0003187053|카빈에 대한 노컷뉴스 기사]] 시민군이 쏘던 카빈소총에 의한 사살이 시민군측에서도 나왔으니, 이것은 북한군이 쏜 것이 아니냐는 주장. 카빈소총을 북한제의 카빈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계엄군은 광주의 7개 주요 통로를 봉쇄했는데 그 중 하나가 광주교도소였다. 광주교도소는 호남고속도로와 국도 옆에 붙어있는 교통요충지이다.[* 원래 2차전 비포장 국도 밖에 없었지만, 1970년대 호남고속도로가 개설되고 기존의 국도가 4차선으로 포장되는 바람에 교통요충지가 됐다고 한다. 2014년 광주교도소는 삼각동으로 이전했다.] 계엄군이 봉쇄한 7개 도로에서는 사상자가 많이 발생했다. 대표적으로 17명이 사망한 주남마을 미니버스 총격사건이 있다. 하지만 당시 카빈소총과 계엄군이 사용하던 M16소총 중 어느 총에 맞았느냐에 대한 분류는 '''육안'''으로 판명해야 했었다고 당시 관계자가 밝혔다고 한다. [[http://ko.wikipedia.org/wiki/5%C2%B718_%EA%B4%91%EC%A3%BC_%EB%AF%BC%EC%A3%BC%ED%99%94_%EC%9A%B4%EB%8F%99#.EA.B4.91.EC.A3.BC_.EC.8B.9C.EB.AF.BC.EC.9D.98_.EC.8B.9C.EC.9C.84.EC.99.80_.EA.B3.84.EC.97.84.EA.B5.B0.EC.9D.98_.ED.8F.AD.EB.A0.A5|이 부문은 위키백과에 정리되어 있으니]] 참고하자. 또한 [[1996년]] [[부검]] 전문가 황적준 교수가 검찰 사체 검안서를 검토한 월간지 기사가 있다. 관심 있는 사람은 읽어보길 바란다. [[http://altair.chonnam.ac.kr/~cnu518/board518/bbs/board.php?bo_table=sub6_03_01&wr_id=981|완전 공개 검찰 작성 5·18사망자 165명 부검 자료]][* 링크가 깨졌는데, [[http://www.bobaedream.co.kr/view?code=politic&No=44465|여기서]] 읽을 수 있다.] 몇몇 희생자는 계엄군의 총격으로 사망했음에도 검시 보고서에 카빈으로 인한 총상이라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밖의 사체검시에 대해서도 여러 의혹점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만 5.18 당시 사체검시를 했던 전남대병원 의사 문OO 씨는 1995년 6월 21일 검찰 진술에서 >"당시 사인 판단에 있어 계엄당국이나 기타 외부로부터의 주문이나 소위 '압력' 같은 것은 없었는가요?" 라는 질문에 대하여 >당시 군의관이나 검찰, 경찰관이 입회하기는 하였지만 그들이 사인 판정을 할 만한 의학적 지식이 없는 상태라 전적으로 저희 의사들이 사인을 판정하였으며, 판정 기준은 검시조서에 나와 있는 대로 총상, 자상, 타박상, 차량사, 미상으로 대별하고, 다시 총상의 경우에는 M16, 카빈과 함께 M16인지 카빈에 의한 사망인지 확정할 수 없는 애매한 사체에 대해서는 기타로 판정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총상의 경우 판단 기준은 저희가 검시현장에서 사체를 살펴보며 사입구와 사출구를 확인하고 그 크기를 재었는데, 사입구와 사출구의 크기가 상당한 차이가 있으며, 사출구의 크기가 큰 경우와 사입구만 확인되고 사출구는 확인이 되지 않는 경우 또는 사체 상태가 불량하여 사입구와 사출구가 명확하게 식별이 되지 아니하나 손상 부위가 상당히 큰 사체는 M16에 의한 사체로 판단하였고, 그렇지 아니한 사체들은 카빈으로 구분을 하였으며, 그러한 기준에 의하더라도 판단이 불가능한 경우는 기타로 분류를 하였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 일체 그러한 압력이나 주문은 없었습니다." 라고 답변을 한 바 있다. 사체검시에 참여했던 윤OO 전남대 의대 교수도 같은 질문에 대해 1995년 6월 15일 전화통화 진술에서 >"당시가 계엄 상황이기 때문에 군의관이 입회를 하였지만 단순히 참여만을 하였고 사진촬영은 경찰관이 하였으나 사인에 대한 판단은 전적으로 담당의사가 하였습니다." 라며, 문OO 씨의 진술과 일치하는 답변을 하였다. 또한 1985년 5월에 [[국가안전기획부]]에서 작성한 광주사태 상황일지 및 피해현황에서는 총상 사망자들의 경우 사망원인을 M16 총상, 카빈 총상, 기타 총상으로 명확히 구분하고 있다. 따라서 이는 사체검시를 했던 의사들의 주장과 일치한다. 직접 사체검시를 한 문OO 씨 및 윤OO 씨의 주장과 황적준 교수의 주장 중에서 정면으로 대치되는 부분[* 황 교수는 M16과 카빈 소총, 그리고 기타 총상으로 분류된 기록은 당시 의사들이 아닌 검찰이 작성했다는 점이 분명하다고 주장한 반면, 당시 사체검시에 실제로 참여한 의사들은 외부 개입은 없었다고 일관된 진술을 하였다.]이 있다. 다만 95년도는 이미 문민정부 시기였고, 당시 사체검시를 했던 전남대병원 의사들이 신군부를 위해 거짓 증언을 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점, 그리고 일관된 진술을 한 사람이 한 명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국방부는 검시 결과에 따라 1985년 7월 광주사태의 실상이라는 제하의 자료에서 총상으로 인한 사망자 128명 중 군이 보유한 M16에 의한 총상 사망자는 29명(안기부 광주사태 상황일지 및 피해현황에서는 36명)에 불과하다고 하였으나 1988년 2월 소준열 장군은 민족화해위원회에서 그 숫자를 45명이라고 증언하였고 1988년 7월 당시 오자복 국방장관은 국회 본회의 답변에서 M16 총상 사망자가 98명이라고 번복했다. 1995년 7월 검찰은 M16 총상 사망자가 96명, 카빈 총상 사망자는 26명이라고 발표했다. 이렇게 M16 총상 사망자가 급격히 늘어난 이유는 사체검시 당시 사망원인을 기타 총상으로 분류한 경우가 다수였으며, 따라서 어떤 총에 맞았는지 부정확한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M16에 의한 사망자 수가 심하게 변동하는 것은 외부 개입이라고 볼 수 있는 증거라 할 수 있겠다. 또한 당시 2선급 화기로 지방 향토사단 및 경찰에서 사용하던 총기가 바로 M1 카빈이었다[* [[향토예비군]]의 오랜친구란 별명에서 알 수 있듯이 카빈은 정말 오랜시간동안 쓰였다. 실제로 예비군에서 완전 도태시킨다고 계획한 시기가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2708387&code=11171211&cp=nv| 5.18 민주화 운동이 끝나고도 34년이 지난 2014년이다.]]]. 당시 사진을 보면 향토사단이었던 [[제31보병사단]]은 카반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으며, 분명한 것은 [[제31보병사단]]에 의해서도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